Catching crumbs from the table

2000년 6월

Ted Chiang

테드 창

메타휴먼의 과학 앞에서, 인간은 메타과학자가 되어버렸다

독자적인 연구가 우리 편집진에게 기고된 마지막 날로부터 25년이 흘렀다. 당시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던 질문을 다시금 살펴보기에 적절한 시기인 셈이다. ‘최첨단 과학 연구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떠나버린 시대에 인간 과학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독자들 상당수는 저자가 처음으로 해당 연구 결과를 낸 개인들이었던 논문을 읽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메타휴먼들은 과학 연구를 주도하기 시작한 이래로 점차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DNT(디지털 신경 전달망, digital neural transfer)를 통해서만 볼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저널은 인간의 언어로 번역된 2차 발표를 위한 영역이 되어버렸다.

DNT가 없는 인간들은 초창기 연구 결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연구에 필요한 새로운 장비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반면, 메타휴먼들은 계속해서 DNT를 개선해 나가면서, 점점 더 DNT에 의존하게 되었다. 인간 독자를 위한 저널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수단으로, 그것도 형편없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가장 뛰어난 인간들조차도 최신 연구결과를 번역하면서 곤혹스러워했다.

메타휴먼의 과학이 주는 이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인간 과학자들은 그 대가를 치렀다. 자신들이 다시는 과학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학계를 완전히 떠났다. 남은 과학자들은 독자적인 연구 대신에 메타휴먼의 과학적 발견을 해석하는 해석학(hermeneutic)으로 주의를 돌렸다.

텍스트 해석학은 처음에 큰 인기를 끌었다. 메타휴먼이 남겨놓은 논문은 당시에 이미 테라바이트 규모로 쌓여있었는데, 논문을 번역한 내용은 수수께끼처럼 보였지만 완전히 부정확하지는 않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를 해독하는 작업은 고문서학자들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일과는 별다른 유사성이 없었지만, 그래도 진척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실험을 통해 조직적합성 유전학(histocompatibility genetic)에 관한 험프리스의 해석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메타휴먼들의 과학장치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유물 해석학(artefact hermeneutic)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과학자들은 유물을 ‘역설계(reverse engineer)’하려고 시도했다. 그 목적은 유물과 경쟁할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기저에 있는 물리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흔히 쓰이는 기법은 나노웨어 기기를 결정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인데, 나노웨어의 진동수는 우리에게 기계적 합성(mechanosynthesis)을 이해할 새로운 통찰력을 주었다.

가장 최신의, 그리고 가장 사변적인(speculative) 연구 방법은 먼 거리에서 메타휴먼의 연구소를 연구하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 대상은 얼마 전에 고비 사막 아래에 건설된 엑사 충돌가속기(ExaCollider)인데, 엑사 충돌가속기가 내뿜는 알쏭달쏭한 중성미자 신호는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휴대용 중성미자 탐지기 역시 그 작동 원리가 밝혀지지 않은 메타휴먼의 유물이다.)

질문은, 과연 이런 연구에 과학자들이 공을 들일만 한 가치가 있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연구를 시간 낭비라고 부른다. 유럽인이 만든 철제 도구를 이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미국 원주민들이 청동 제련술을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메타휴먼과 경쟁하는 관계였다면, 이 비유는 조금 더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풍요로운 경제에서는 그러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사실, 과거에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을 지닌 문명과 대립했던 낮은 수준의 문명들 대부분과는 달리, 인간은 동화되거나 멸종될 위기에 처해있지 않다. 이를 인지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아직까지 인간의 뇌를 메타휴먼의 뇌로 개량하는 방법은 없다. 뇌가 DNT와 호환되게 하려면, 반드시 태아의 신경 발생(neurogenesis)이 일어나기 전에 스기모토 유전자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듯 인간을 동화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메타휴먼 아이를 둔 인간 부모가 어려운 선택과 맞닥뜨려야 함을 의미한다. DNT를 쓰도록 하락한다면, 인간 부모는 자녀가 메타휴먼의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한다. 그렇다고 자녀가 형성기에 DNT를 쓰지 못하게 한다면, 메타휴먼의 입장에서 볼 때 카스파르 하우저가 겪은 고통*에 준하는 고통을 주는 행위를 자행하는 셈이 된다. 최근, 자녀가 스기모토 유전자 처리를 받게 하는 인간 부모의 비율이 0%에 가깝게 떨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 19세기에 있었던 유명한 아동 학대 사례, 유년기 대부분을 감금된 채로 자란 카스파르는 16살 나이에 6살 수준의 정신연령을 가지고 있었다. - 옮긴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문화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 전망이며, 과학적 전통은 그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해석학은 과학 연구를 위한 타당한 방법이며, 독자적인 연구와 마찬가지로 인류 지식의 총량을 증가시킨다. 더 나아가, 인간 연구자들은 메타휴먼들이 생각하지못한 응용법을 찾아낼 지도 모른다. 메타휴먼들은 스스로의 우월성으로 인해 인간의 관심사를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연구를 통해 또 다른 지능 강화 요법을 찾아낼 희망이 있고, 그 지능 강화 요법으로 사람들의 지적 능력을 메타휴먼과 대등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한 치료법은 우리 종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문화적 분열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메타휴먼들은 이를 연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인류가 계속해서 연구할 정당성은 충분하다.

우리는 메타휴먼의 과학적 성취를 보며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메타휴먼을 만든 기술이 본래 인간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메타휴먼이 우리보다 더 똑똑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